top of page

  신들의 악희 토트 카도케우스 드림

  토트 카도케우스 x 셰키나 테오파네스

  천일야화

  아, 여기 좀 위험하겠네. 도서관의 한 구석에서 문득 생각한다.

  무언가 거대한 흐름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고 있다. 아, 역시 좋아하지 않아. 이런 느낌은. 눈을 감고 천장 즈음에 얼굴을 향한다. 나를 감싸안고 건드리는 힘. 목에 건 스태프를 손목으로 옮긴다. 손바닥 위로 올라온 작은 모형을 느릿하게 쓰다듬고, 꾹 쥔다. 아프게 찔러오는 첨단이 유난히 뭉뚝하게 느껴진다. 칼을, 뽑을까?

  힘이 흔들리고 있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자니 발가벗은 기분이 든다. 어찌, 해야 하지? 일렁이는 힘의 파장은 익숙하다. 나는 이 힘을 한 번 겪은 적 있다. 아닌가? 두 번이던가. 어차피 둘 다 딱히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다. 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던가,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는 꼴은 안날 테니 고맙게 생각해야 할 처지다. 하하, 살아있으면 무언가 달라진다고 하는 말이 왜 지금 떠오르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감정 상태에 의문을 표하다가, 문득 현실감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방어기재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어차피 당황이 내게 줄 수 있는 이점도 없으니 좋은 일이다. 긍정, 긍정적으로.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거대한 서가 앞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은 늘 새롭다. 웬만한 책은 저도 다 읽어보았다 자부했건만, 이곳에서 마주하는 책은 저도 실물을 보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하다. 아, 어느 것을 고르면 좋지. 사방이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는 이점은 늘 내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책, 책. 글, 이야기, 상상, 지식. 씹어 삼키고 싶은 무언가. 어딘가 폭력적으로 변질된 생각은 흘러넘치는 욕망이 된다. 하나라도 더 알고, 하나라도 더 쓰고 싶어.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직전까지 눈에 담을 글자는, 무엇이 좋지?

  손가락이 책등에 닿는 순간 또다시 일렁이는 공간.

  힘에서 방향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토록 거대한 힘에 방향성이 없다, 라. 이대로는 시한폭탄밖에 되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 트리거는 책인가? 다시 책등에 손을 대면 얌전하던 힘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시험 삼아 책을 뽑아 손에 들어보면, 당장이라도 터질듯 부풀어 오르는 힘. 허나 안정적으로 모양을 갖추는 꼴을 보아 터지진 않을 모양이다. 아무래도 책을 펼쳐야 발동되는 종류로군.

  느긋한 걸음으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닌다. 시간제한이 없다면 전부 둘러보고 책을 골라도 좋겠다. 시간은 많다. 지독하게 뒤틀린 공간에 누군가 들어올 리도 없고, 내가 나갈 수 있을 리도 없다. 철저하게 고립된 공간. 고독이 부족했던 요즈음을 떠올리면 별로 나쁘지 않다.

철저하게 세계에서 유리된 공간.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나. 마치 이 세계에서의 제 위치를 시각화하기라도 한 모양새 아닌가. 외로움 따위 느낄 필요도 없다. 내게 필요한 감정은 그 무엇도 아니다.

 

  이 책이 좋겠다.

  본능처럼 내뻗은 손에 잡히는 책은 상당한 두께. 묵직한 무게가 손목을 꺾을 기세로 내리눌러온다. 화려한 금박으로 뒤덮인 하드커버의 표지. 한자로 된 제목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천일야화.

  눈에 아프도록 박히는 한자를 읊조린다. 마치 주문처럼 느껴지는 단어를 몇 번이고 웅얼거리다가, 느긋한 손길로 책을 펼친다. 반전되는 세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선명한 청금석의 색.

  침잠하는 의식은 쉬이 그 기억을 지워낸다.

 

*

 

  “셰..자..”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깊게 가라앉은 의식은 주변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 무언가, 잊어버리고 있는 일이 있다. 애초에 나를 소리로 깨울 사람이 몇이나 있지? 기숙사 방의 열쇠를 다른 이에게 넘겼던가? 아니, 애초에 나는 잠을 자지 않아.

  “셰헤라자데 아가씨!”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처음 의식하는 것은 사방에 하늘하늘하게 늘어진 천. 고급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 천은 침대의 사방에 늘어져 있다. 부드럽겠네. 건조한 감상에 이어지는 것은 시야의 확장. 저를 깨운 목소리는 여전히 간절함을 담고 울린다. 누구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 표정 가득 안타까움, 아쉬움, 슬픔 따위를 담고 있다. 제게 저런 표정을 보일 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아가씨, 오늘이 결혼식 당일입니다. 부디, 일어나 주세요.”

  결혼식?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일인가. 제게 결혼할 사람이 어디 존재나 했단 말인-

  아.

  책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데 걸린 시간은 이쯤이다.

  그녀가 자신을 불렀던 이름을 떠올린다. ‘셰헤라자데’. 천 일 하고도 하룻밤동안 이야기를 풀어낸 여인의 이름. 제가 펼쳤던 책이 천일야화임을 떠올리면 쉬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책 속으로 들어왔구나.

  지독히도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납득함은 어차피 제 일상에 현실감 따위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들 제가 자각하는 그 곳이 현실이고,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그 곳이 모두 환상일 터인데 내가 굳이 분리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제 앞에서 애원하는 얼굴로 제게 애원하는 이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게 그네들의 감정은 현실로 다가오지 못한다. 머리로 받아들인 감정은 가슴에 닿지 못해. 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내게 닿지 못한다.

  그러니 이리도 차가운 이를 내치면 좋으련만.

  “아가씨……. 지금이라도 도망가시면 안 돼요?”

  “그러면 너를 포함한 모두가 죽게 될 거란다.”

  “괜찮아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충직하구나.”

  나긋나긋 내뱉는 말은 제가 평소 하던 말과는 전혀 다른 언어. 어차피 여기 떨어진 이상 제 운명은 정해져있다. 그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서 춤추면 그만. 천일 하고도 하룻밤이 더 지나가면 어련히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아니라도 죽으면 그만이다. 죽음은 어차피 늘 바라왔던 것. 내게 손해 볼 것이 무어 있지?

  그리하여 저는 인자한 미소를 꾸며내어 시녀아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것이다.

  “나는 괜찮아.”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시녀로서 좋은 태도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꽤 감격스러운 태도. 그래, 재상의 지혜롭고 어진 외동딸 셰헤라자데에게는 이런 사람이 어울린다. 모형정원의 셰키나 테오파네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문득 제가 잃어버린 인연이 떠올라 속이 울렁인다.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고소한다. 아아, 정말 우스울 정도로 닮아있다.

  시녀는 저를 따르다 죽어버린 후배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구보다 고귀한 자리에 오를 뿐이란다.”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고 있으면 울음소리가 높아진다. 허나 진실이지 않은가. 술탄의 정비는 이 나라의 어떤 여인보다 높은 위치이다. 그 뒤로 내가 입을 조금이라도 잘못 놀리면 죽게 되겠지만. 뭐, 딱히 유감을 느끼지는 못한다. 허나 제 덤덤함이 아이에게는 더욱 큰 슬픔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결국 한참을 더 울다가 다른 시녀들의 손에 밖으로 끌려 나갔다. 아가씨, 우리 아가씨……. 그녀는 밖으로 끌려 나가는 내내 그리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씨.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화려한 의상이 제 몸에서 떨어져나간다. 분주한 손이 저를 가꾸고, 또 가꾼다. 희게 뻗은 나신 위로 수많은 오일이 발라지고, 길지 않은 머리카락 위로 향료가 부어진다. 분명 제게는 어색한 일이지만, 제 몸은 익숙하기 짝이 없다.

  익숙함에 젖어 눈을 감는다. 조금 모자란 수면을 채우고, 어떤 향이 좋냐 물어보는 말에 네 마음대로 하라 답하고, 나른하게 몸을 맡기면-또 누군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흐느끼고, 또 흐느끼고, 울고, 결국 탈진하여 사라지는 사람들.

  그네들의 작품과 같이 저는 아름답게 꾸며졌다. 허나 그 경이로운 완성의 순간에 남은 사람은 처음 만난 시녀아이 하나뿐. 그녀는 여전히 물기가 지워지지 않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고한다.

 

  “아름다우셔요.”

  “그러니?”

  “네.”

  “다행이구나.”

  그녀의 애절함에 공감할 수 없어 건조한 답을 내어 놓는다. 아련하게,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웃음을 짓는 아이. 아아, 정말 이 세계는 내게 지독하구나. 추억에 젖어 저도 웃음을 돌려준다. 그러면 그녀는 또 울기 시작한다. 아니, 모두가 울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참, 누가 보면 딸을 결혼시키는 집이 아니라 초상이라도 치르는 줄 알겠다. 아니, 딸 가진 집은 모두 초상집이지. 우리 집이 마지막 초상집이 될 뿐.

술탄의 왕비로 자전한 산 제물, 셰헤라자데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을 빌려 쓴 세키나는 울고 싶어 눈을 감았다. 아, 저 아이는 자꾸 그 아이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든다.

  그녀는 제가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울음 속에서 그녀는 술탄의 궁으로 떠났다.

*

 

  술탄의 궁은 화려했다. 눈이 멀 정도의 화려함이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게 흩뜨려 놓는다. 춤추는 무희, 노래하는 악사. 그들 사이에서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자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저 굳히고 있을 따름이다. 제가 결혼할 이가 누군지 고민조차 되지 않는다. 그가 누구이든, 그저 운명에 맡기면 그만.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허나 생각지도 못한 이가 앞에 나타나는 것도 운명이다.

  왕좌에 앉아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의아함도 잠시, 익숙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눈을 내리 깐다. 조신함을 연기하는 머릿속에서 핑글핑글 계산이 돌아간다. 저 자가 여기 있을 이유가 무엇이지? 같은 무대 위에 선 배우는 차마 배우의 자리에 오르리라 생각도 못해봤던 자. 제가 셰헤라자데라면, 그는 샤흐리아르 왕이란 말인가? 잘 어울리는 치이긴 하나 문득 웃게 됨은 어쩔 수 없다.

  토트 카도케우스에게 술탄이라니. 그 오만한 신이 인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꼴을 보니 웃음이 난다.

관리하지 못한 표정은 분명 보여 좋을 게 없다. 얼굴을 대부분 가린 천에 감사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 뒤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 페르시아의 궁중예절이 어땠더라?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이 시대의 예법 따위 알지 못한다. 허나 괜찮다. 이 책에는 그런 사소한 부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제가 제대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천 일 하고도 하룻밤의 밤놀이. 그 외의 일은 아무리 엉망이라고 한들 절 죽이지 못한다.

 

  “위대한 술탄께 인사드리지요. 재상의 딸, 셰헤라자데입니다.”

  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나직하게 뽑아 올린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으나, 딱히 필요 없는 노력이었던 모양이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의 색이 아름답다. 아아- 정말 나도 중증이야. 그가 내게 보이는 태도는 일관적이다. 무시, 깔봄. 그 어떤 대답도 없이, 고개를 들라 명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방치할 뿐. 왕의 권위를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안다. 허나 무례라는 사실도 안다. 그럼에도 감정이 상하지 않음은, 그는 원래 그런 이니까. 저는 그저 숙인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시선을 느끼면서, 가만히 웅얼거리는 것이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일이 별로 즐겁진 않네요.

  저 위에 앉아있는 이가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이런다. 그의 얼굴을 닮은 이에게 이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었더니, 그건 또 아니다. 기억도 없는 이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취미는 없으나, 아무래도 그런 이를 사랑하는 취미는 새로 생길 모양이다. 여튼, 저 얼굴과 목소리는 아주 해로울 정도로 취향이다.

  그럼에도 입 속에서 씁쓰레하게 남는 이 알갱이는 무엇이지? 아아, 그래. 이건 위화감이다.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감각.

 

*

 

  그는 제멋대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옷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조금 아련하게 남는다. 그리고 몰아치는 것은, 폭풍 같은 손길. 제가 입궁하는 것으로 끝일 줄 알았건만, 결혼식은 또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내내 사용인들은 침울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벌써 다음 신부를 어디서 구할지 걱정하는 이도 보이니, 새 신부인 제가 받은 취급이 얼마나 너무했는지 알만하겠지. 셰헤라자데의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 그네들은 내 안부를 걱정하는 척 저희들을 걱정한다. 무어라 말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다가, 차라리 도망치라고 이야기하던 아이가 떠올라 입을 다문다.

 

  “죽기엔 너무 아름다우셔요.”

  화장이 끝나고, 완성품이 된 제게 그녀는 그리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주변인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타박을 듣는다. 다들 제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을까 기민하게 살피는 눈치다. 사실 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게다가 별로 듣기 나쁜 말은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인상이 흐릿해서 제대로 기억할 수 없겠네. 미안하게도. 아쉬움이 줄줄 흘러넘치는 얼굴 앞에 죽지 않는다고 일러주고 싶었지만, 저도 확신하기 어려워 입을 다문다.

*

 

식은 단출하게 치러졌다.

 

*

 

  토트 카도케우스의 얼굴을 한 자의 손을 잡고, 영원을 맹세하는 건 참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가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렇게 생각하고야 만다. 제가 사랑한 얼굴을 하고, 사랑하던 목소리로 나와 영원을 함께하겠다 말하면, 제가 뭐가 되는가?

  무릇 배우 중에서 제일 어리석은 치는 너무나 몰입하여 자신을 잃어버리고야 마는 족속이다. 그럼에도 저는 제가 셰헤라자데가 되었음을 나는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했다. 그는 샤흐리아르 왕이다. 나는, 그의 현명하고 어진 왕비 셰헤라자데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맹세해야 하는 순간에, 저는 아주 조금 망설이고 말았다.

제 속에서 솟아오른 그 작은 송곳은,

  원망인가 아쉬움인가.

 

*

 

  “어리석은 것.”

  저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가 남기고 간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저는 마땅한 대답을 알지 못해, 그저 고개를 숙인다. 어차피, 저는 흐름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감정 따위 알게 무엇인가.

그럼에도 결혼식에서 저를 애달프게 바라보는 재상의 눈은 조금 깊게 남는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사라질 것 같은 눈은, 꼭 누군가를 닮아 있어서.

  정신없이 몰아치는 손길은 또다시 저를 가꾼다. 왕의 품에 안길 몸을 닦고, 깎고, 부드럽게 마사지한다. 어차피 내일 죽을 몸이라며 이리 지극정성을 들일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허나 제 생각만 그런 모양이다. 이제 조금 귀찮은데. 해봤자 소용없는 불평을 주워 삼킨다.

  날이 흐르고 흘러서 제가 술탄의 침대 위에 올라갔을 때, 그네들은 아주 오랫동안 저를 응시했다. 어딘가 숙연하고 주술적인 기운마저 느껴지는 시선. 그건 분명 죽음을 맞이할 이를 마지막으로 기억하겠다는 태도라, 저는 살풋 웃었다. 제가 죽는 것을 슬퍼하는 이들이, 조금 우스워졌다. 그리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말 할 용기는 없다. 그네들에게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그의 손에 죽는 것이 제게 기쁨이 될 터인데, 저 치들이 그것을 이해 할 수나 있겠는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면, 의연한 산 제물 연기나 하면서 다정한 윗사람 놀이나 즐겨야지.

  그들은 마지막까지 저를 응시하며 방 밖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혼자 남았구나. 기묘한 고요 아래서 울렁이는 혼란을 자각하며 입을 다문다. 제 몸 속에 혼란을 가두고 저무는 해를 멍하니 내려다본다. 안녕, 자유. 이제 너와 손을 잡을 날은 멀리 있겠구나. 술탄의 아내란 그런 자리니까.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내궁의 가장 깊숙한 방. 술탄이 아니면 다른 남자는 아예 마주할 수 없는 곳. 저는 그 곳에 혼자 앉아 있게 되었다. 보편적인 상황이라면 같이 대화를 할 후궁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음행을 술탄에게 들켜 모두 목이 잘려나갔다. 뭐, 제가 아는 이야기가 그렇다는 소리다. 그들이 정말 존재했는지 제가 어찌 안단 말인가? 저 술탄의 성격이 모형정원의 그와 같다면, 여자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꼬여 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금 숨이 막힌다. 만약 이 곳이 제가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어찌 해야 하나? 무대에 내던져진 배우에게 대본이 없다면, 어찌 되는가. 뭐, 실패한다면 죽으면 된다. 허나 이곳의 제겐 죽을 자격이 있는가? 탈출에 실패한다고 내게 실 될것이 있나? 허나 득 될것도 없지.

  셰헤라자데의 생각과 셰키나 테오파네스의 생각이 어지럽게 섞인다. 휘몰아치고, 돌고, 파괴한다. 상식과 비상식이 어지럽게 섞여 일상마저 비일상으로 변해간다. 오직 그에 대한 사랑과 경외만이 변하지 않는 지금, 나는 그를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가? 신으로 모셔야 하는가?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허나 제게 마음에 드는 일이 언제 존재라도 했던가? 혼란스럽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알게 되겠지. 얼굴을, 마주한다면.

  그와 동침해야 하는가?

 

  아, 이번에는 정말 숨이 막혔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 셰헤라자데에게는 당연한 이야기가, 현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셰키나 테오파네스에게 있어서 성적인 유희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았으니까. 허나 술탄의 비 되는 몸으로 잠자리를 거부할 수도 없는 법 아닌가? 저는 문득 두려워졌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어지럽게 몰려든다. 도망이라도 칠까. 그 나약함을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 계시처럼 문장이 떠오른다. 여기서 내가 물러선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지? 달라질 것 하나 없다면 마주하는 것이 최선. 순교를 기다리는 심정도 이보단 덜 참담하겠구나.

  저 멀리서 울리는 발소리는 필시 그의 것. 아아, 그리도 대단하신 술탄의 행차시다.

 

  느릿하게 고개를 숙인다. 어찌 잠자리에서도 이리 위계질서가 확실한지. 그의 옆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집안의 유일한 영애인데, 함부로 얼굴도 마주할 수 없다니. 불평등함에 불평을 말할 것도 없이 인사의 말을 내뱉는다.

 

  "술탄을 뵙습니다."

  여전히 엉성하기 짝이 없는 궁중예법이다. 허나 내 머리에서 나온 예법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나는 이슬람을 배경으로 글을 써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자료를 조사한 적도 없다. 궁중 예법에 대한 자료가 머릿속에 있을 리가 만무하니, 이건 그저 추측으로 이루어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가 무어라 질책하지 않음을 보아하지 영 틀린 예법은 아닌 모양이다.

  다소곳한 자세, 라고 하는 불편한 자세로 한참을 땅만 바라보았다. 그의 발이 제 앞에 다가왔지만 저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왕 앞에 선 여자가 다 그렇지. 이 시대의 인권 의식이 낮음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얼마나 카펫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 무늬가 눈앞에 선연하여 다시는 이 카펫을 보지 않겠다고 장담할 즈음에야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라."

  아까도 생각했지만, 이곳은 정말 애매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아랍어를 쓰는 주제에, 그와 저만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 머릿속에서 나온 세계라고 믿었건만, 어찌 한국어가 아닌지. 그 모습이 평소의 그를 더욱 떠올리게 하여 기분이 더욱 까슬한 알갱이를 남긴다. 차라리 언어라도 달랐다면 그 지고한 지혜의 신을 떠올리지 않으련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와 똑같은 주제에, 언어마저 같다. 역시 여긴 내게 불친절해.

  고개를 들면 그새 뻐근해진 목에서 소리가 날 것만 같다. 고개를 움직여 풀어주고 싶지만, 감히 절대 권력의 술탄 앞에서 그럴 배짱은 없다. 혹시 아는가, 그가 자비를 베풀어 영원히 목이 뻐근하지 않도록 몸에서 분리시켜 줄지. 그런 자비는 원하지 않는다.

  시선을 들 곳이 없어 어지러이 배회한다. 아득한 기억 속 예법을 찾아보지만 확실한 자료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왕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무례가 되는가? 모르겠다. 알지 못하는 예법이 제게 목숨의 위협으로 다가올 줄 알았다면 미리 예법을 생각해 둘 걸 그랬나. 때늦은 깨달음은 소용없는 법이다. 저는 결국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눈을 마주한다. 남편의 눈을 마주하는 아내가 목이 잘리지는 않겠지? 따위의 한가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아름다운 눈이다.

  그 어떤 바다를 가져다 대어도 그보다 청명할 수 없고, 그 어떤 하늘을 가져다 대어도 저보다 압도적이지 못하겠지. 저리도 진하고 아름다운 색을 보고 있으면, 예전 청금석에 목숨을 걸던 화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저리도 아름다운 색을 영영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도 전 재산을 털어 물감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 것으로 붓질 한 번, 숨 한 번 조절해가며 그의 눈을 그려내야지.

  아, 웃음기. 그의 눈에서 웃음기가 읽힌다. 그리고는. 호기심과, 경멸?

  차가운 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그래, 그는 지금 내 사랑을 읽어 낸 것이다. 아아, 멍청한 테오파네스. 셰헤라자데의 그 아름다운 희생은 지금 그저 사랑에 눈이 먼 인간의 어리석은 투신이 되어버린다. 그의 반반한 얼굴에 홀려 불인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나방이 되어버렸다. 어찌 이토록 어리석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그에게 가진 유일한 이점은 세헤라자데의 용감함이건만, 제 손으로 그걸 모두 내던져버렸다. 우습고 불쌍한 테오파네스. 무대 위에서 제 역할을 잊어버린 배우가 되어 무엇을 하겠단 말이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칼날처럼 떨어진다.

  “어리석은 놈이다. 사지로 뛰어든 용의가 무엇이지?”

  “재상된 자의 딸로서, 더 이상 이 나라의 여인이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오? 흥미롭군. 네놈은 죽지 않으리라 믿는 건가.”

  “제 삶과 죽음은 모두 술탄께 달려있지요. 저는 그저 한 명의 죽음을 늦추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나불나불 잘도 떠들어 대는 군. 정작 네놈의 눈은,”

  아, 여기서 익숙한 패턴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를 어찌 생각할까? 제 턱을 들어 올려 얼굴을 마주하는 그를 보며 덤덤하게 생각했다. 이리 보면 영락없는 토트 카도케우스다. 얼굴이며, 저를 협박할 때 제 미모가 제일 잘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이용하는 모습이며, 목소리까지. 제가 사랑하던 그 모습 그대로 남편이라며 앞에 서 있다. 실감이 나지 않아 실없는 생각을 조금 한다. 사랑의 이뤄짐을 결혼에 둔다면, 나는 성공했구나.

  "다른 감정을 품고 있지 않은가."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낮고 달콤하다. 그럼에도 녹은 초콜릿과 같은 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에 그런 무해한 것을 가져다 대면 모욕이 된다. 차라리 달콤한 독이라고 하는 쪽이 더욱 어울리지 않겠나. 저토록 치명적이고, 서서히 파고들어 저를 결국 죽이고야 말 존재에게 독 말고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저토록 아름다운 자는 위험하다. 제 이성을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말 맹수. 약점을 드러내놓으면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침착하자, 셰헤라자데.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앞에서 평정을 가장한다. 배우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다 하면 그만. 저는 지금 셰키나 테오파네스가 아니라 셰헤라자데일 따름이다. 잊지 말거라 어리석은 자여.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네놈이 더욱 잘 알고 있겠지. 빤히 보이는 것을 부정할 셈인가?'

  “소녀, 어리석어 술탄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거짓이군.”

  “지고하신 분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렇겠지요. 술탄께서는 진실마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까.”

  과거와 같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언어 구석구석에 어려 있는 치기를 조심스럽게 골라낸다. 샤흐리아르를 대하는 언어와 토트 카도케우스를 대하는 언어는 달라야 한다. 셰키나의 언어와 셰헤라자데의 언어가 다르듯. 그럼에도 그를 대함과 같은 태도를 취함은, 사랑을 포기하지 못함인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쉬이 입술을 탐한다. 집어삼켜진 숨결은 그의 입 안에서 처절하게 농락당한다. 오직 혀놀림으로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 다르지 않다. 말을 하든, 이리 혀를 섞든 간에 말이다. 허나 여유를 부리는 시간도 잠시, 서서히 길어지는 입맞춤과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손에 밀려 조금 마음이 다급해진다. 각오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익숙하지 않다. 아아, 차라리 그가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면 더욱 침착했으리라.

  서서히 뒤로 넘어가는 몸. 어느새 침상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방의 공기는 아무리 무던한 이라도 알아차릴 만큼 달아올라있다. 이 달아오름이 어찌 변모하여 저를 덮칠 것인가. 기민하게 돌아가는 머리를 그는 비웃는다. 저는 문득 입속 가득 들어차는 씁쓸하고 까슬한 모래를 자각한다. 마치 사막의 모래와 같은 그것을 가득 물고 말을 잃어 버린다.

  제 머리의 양 옆에 손을 둔 그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덮칠 수 있는 위치에서, 제게 고한다.

  “나는 너를 품고, 죽일 것이다. 내일이면 네놈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내쳐지겠지.”

  “그렇습니까.“

  “울어보아라. 혹시 아는가? 네놈이 좋은 목소리로 운다면 살려줄지.”

  “명하신다면 그리 하겠으나, 명이 아니라면 굳이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재미없는 것. 네놈은 목숨이 소중하지도 않은가?”

  흥이 식었다는 표정. 그래, 이 순간을 노렸다. 그는 지혜의 신. 지혜를 탐구하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 무엇보다 즐거울 터. 만약 이 왕이 제가 아는 그 신과 성격이 같다면, 이 미끼를 물것이다. 도박을 거는 일을 즐기지는 않으나, 제 목숨은 어차피 소중하지 않다. 더군다나 운명이 제 편인데 무엇을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술탄께서 소중하지 않다 말하시면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지요. 허나 제게 발악을 원한다면 기꺼이 명 받잡겠습니다. 울며 구걸하라 하셨으나 저는 구걸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허니 거래를 청하도록 하지요.”

  “거래, 거래라. 네놈이 나와 동등하다고 보는가?”

  “언감생심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은 적은 없습니다. 허나, 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술탄께서 허락하신다면, 소녀가 입을 놀려 보겠습니다.”

  “허하지. 무슨 거래를 제안할 셈이지?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라면 네놈의 혀를 자르겠다.”

  “소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지요. 술탄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듣고,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 저를 안고 죽이시면 됩니다. 허나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절 살려 주시지요. 그렇게 천일 하고도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느릿하게 말을 끌며, 그의 앞에서 처음으로 웃어 보인다.

  “소녀를 살려주시는 겁니다.”

  그는 대답 없이 제게서 떨어져나가 길게 몸을 펴고 눕는다.

  “호오, 그런 말이라면 흥미로운 제안이군. 좋다, 받아들이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시작해라.”

  그리하야 셰헤라자데를 흉내 내는 어리석은 소녀의 천일야화는 시작되고야 만 것이다.

 

*

 

  아아, 내일의 해는 떠오르고야 말았다. 미미한 절망을 닮은 중얼거림이 흘러내린다.

  건방짐을 가장한 필사의 발악은 그에게 먹혀들어갔다. 저는 이렇게나마 하루의 유예를 얻어 그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다. 하룻밤 내내 저는 의미 없는 문장을 엮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차라리 그가 저를 죽여 달라 애원하면서, 의미 없는 생각을 반복하면서. 달은 지고 해는 떠오른다. 저는 이리 살아남아 해를 보고 있다. 이야기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버렸다. 허나 괜찮다. 이렇게나마 운명을 진행시키면 된다.

  한 가지 이뤄내기야 했으나 제게 확신은 없다. 이리 흐르는 것이 운명이라는 직감은 있으나, 천 일 하고도 하룻밤을 더 지새우고 나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허나 능력 하나 없는 평범한 아녀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발악이 더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 이었다. 머릿속에 그래도 너는 어제 목숨을 구걸하며 비참하지 않았나 묻는 목소리가 있다. 무시한다.

  지독한 시간이 지나갔으니 이제 그리도 사랑하는 일을 할 시간이다.

  술탄께 고해 올리는 말에는 책을 읽었다 했으나, 실로 책을 읽어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진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제가 읽은 책을 그가 읽지 않았을 리가 없다. 술탄의 궁에 없는 책이 재상의 집에 있다면 우스울 일이지. 그럼에도 이야기를 하겠다 함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믿은 것은 그저 제 실력. 이야기를 빚어내고 끊임없이 흘려내는 능력. 사랑해 마지않는 재능에 목숨을 걸었다. 자, 나를 비웃어도 좋다. 어리석은 이라 매도하여도 좋다. 허나 저는 글을 쓰기 위해 살아가는 몸. 제 재능이 인정받지 못한다면 죽으면 그만. 이리 죽는 일 또한 행복이 되고 꿈을 이루는 일이 될 터이니, 거리낄 것 하나 없다.

  게다가 저는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핑계거리를 가득 품에 안고 여명을 즐긴다.

  새벽녘의 여명 아래서, 조용히 비단에게 속살였다.

  너는 어떤 이야기가 좋니?

 

*

 

  술탄은 참으로 변덕스러운 이다.

  그의 폭정이 실로 배신감이라 믿는 어리석은 이가 어디 있을까. 그의 옆에서 지내며 느낀 것은 그저, 그가 모든 것을 귀찮아 할 뿐이라는 사실. 그는 그저 제게 귀찮게 달려드는 이들을 쉬이 처리하기 위해 폭군의 가면을 택했을 따름이다. 지혜롭기도 하지. 조금의 비꼼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 우습지도 않은 밤놀이는 꽤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 이제 같이 지낸 일수는 어림잡아서 세 자리수가 넘어간다. 분명 저는 삶에 질렸다는 이유로 몇 번이고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몇 번이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허나 그는 저를 죽이지 않았고, 품겠다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소년의 탈을 뒤집어 쓴 정령이 물었습니다.”

  저를 살려둠은 한낱 변덕에 의한 결과인가? 아니면, 그가 제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리석은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날이면 웃음을 삼켰다. 로맨틱을 기대하기에 저는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짓은 한 번으로 되었다.

  “너는 삶과 죽음, 어느 쪽에 가치를 둘 셈이냐?”

  기대를 짓밟아 만들어낸 평정은 우습도록 비참하다.

  “그만.”

  “…….”

  그는 이야기를 끊어낸다. 저는 제 죽음을 기대하며 숨을 삼킨다. 그는 이제 무어라 이야기 할 것인가. 의미 없는 상상을 몇 개 떠올려 보지만 어울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제가,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여전히 두려운 성애에 대한 우려를 표해야 하는가, 지겨운 삶이 끝나감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가.

 

  “묻지. 네놈이라면 무엇이라 대답했겠는가?”

  “무엇에 대한 물음이십니까? 제가 아둔하여 술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네놈은 삶과 죽음, 어디에 가치를 둘 셈이지?”

  터져 나오려는 광소를 씹어 삼켰다. 제 기대는 이토록 철저하게 배신당하였다. 죽음을 선사해 달라 했더니, 내게 던져진 것은 관심인가. 관심, 관심. 그 빌어 처먹을 것을 셰헤라자데의 몸으로 샤흐리아르에게 받고 있다. 감히 미천한 것이 어찌 술탄에게 제 의견을 고해 올리냐며 죽여 달라 이야기할까?

  되어먹지 않은 생각이다.

 

  “제겐 그 어느 것도 가치가 없습니다.”

  “호오?”

  “미천한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그저 흐름이지요. 제가 가치를 두는 것은, 그 사이의 성취. 무엇을 이뤄내고 무엇을 바랐나. 삶에서 얼마나 빛났는가. 그 곳에 가치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영광입니다.”

  여전히 흥미에서 비롯된 관심인가. 더 이상 상처받을 구석도 없다고 생각하였건만 작은 상처가 또 하나 새겨진다. 몇 번이나 말해야하는가. 어리석은 셰키나 테오파네스. 너는 지금 셰헤라자데이다. 샤흐리아르에게 토트 카도케우스를 찾아 무엇하냐는 말이다.

  “계속해라.”

  “소년은 답했-”

  “아니, 이야기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네놈의 의견을 계속 떠들어보아라. 재미없는 이야기보다는 들어줄 만하군.”

  분명 제가 이야기를 지어냄에 있어 의욕을 가지지 않았건만, 어찌 이 말에 상처를 받는가. 문득 우스워졌다. 자부심을 짓밟히고도 아무렇지 않게 떠드는 제가 한심하여 살심이 솟구친다. 아아, 역시 이 빌어먹을 사랑을 진즉에 포기해야 했어.

  “무엇에 대한 의견을 원하십니까?”

  “네놈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해라.” 

  그렇게 이백 일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 날. 저는 그에게 저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

 

무엇이든 한 번 허락하면 더욱 쉬워지는 법이다.

 

*

 

  인정하겠다. 저는 그에게 물러터진 과육보다 더욱 무르게 대했다.

  “그리하여 지혜의 신 앞에 꿇어앉은 소녀가 고했습니다.”

  제가 의견을 이야기한지 삼백 여 일이 지나고 나서, 그는 조금 더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요구했다. 긴장을 풀고, 그에게 저를 드러내는 것을 거리끼게 되지 않은 날 즈음이었다.

  “신이시여, 어찌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돌리고 돌린 말 속에서 그는 제 이야기를 해 보라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는 셰헤라자데의 이야기를 하였다. 재상의 딸이 살아온 나날을. 그녀가 어찌 태어나 어떤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왔는지. 제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주변인의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그러니 어느 날 그가 이야기했다.

  [네놈은 거짓을 고하고 있군.]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술탄이시여?]

  [지독히도 행복하다 이야기하는 네놈의 눈은,]

  또다시 반복이었다. 코가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가져다 댄 그가 또 내 영혼 위에 인두를 지진다. 낙인처럼 새겨지는 한마디.

  [비어있지 않은가.]

  그는 또다시 제 숨을 집어삼켰다. 저를 헤집고 탐하며 그는 몸짓으로 고하고 있었다. 네가 말로 재미를 줄 수 없다며 네놈의 몸에서 재미를 찾아내겠다고. 그 앞에서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단 말인가? 죽음을 원하면서도, 결국 운명의 수레바퀴에 매여 굴러가고 있는 배우는, 그의 의도대로 휘둘려 주는 수 밖에 없었다.

 

  헐떡이는 숨을 골라가며, 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내뱉는다.

 

  [흥미를 원하신다면, 이세계의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술탄이 들어본 적 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허락하지.]

  입 꼬리를 틀어 올려 웃는 모습은 분명, 이 상황을 유도했다는 증거. 들어나 보자는 식의 어조. 선명하게 드러나는 즐거움. 저는 그의 장난감이 되어 침대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꼴이다. 아니, ‘그’의 장난감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딱히 유쾌하진 않다.

  허나 하지 못할 놀음도 아니다.

  편하게 벨 곳을 찾는 그에게 제 다리를 내어주고, 저는 가만히 셰키나 테오파네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무대 위에서 역에 심취한 배우가 늘어놓는 자전. 저는 그에게 어디 한 번 동정해 보라며 조롱하는 어조를 한껏 담아내는 목소리. 최대한 비참하게 부풀려지고, 최대한 감정적으로 각색한 이야기를 마치 진실인양, 진실을 거짓인양.

  이것이 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다.

  참으로 비참한 꼴이다. 저를 내려다보지 않는 사랑의 얼굴을 한 술탄 앞에서, 비의 얼굴을 한 상처 입은 소녀가 제 이야기를 동정해달라고 발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깨달아서 달라질 것이 무어있단 말인가? 저는 제 이야기가 아닌 양, 제 이야기인양 사랑을 속살였다.

  “그러니 신이 답하였습니다.”

  그의 짙푸른 눈 속에서 제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보인다.

  "네놈은 흥미로운 실험체다."

  글쎄,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상처받았던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

술탄이시여, 신이시여, 나의 구원자, 가볍고, 나를 시험하는 자. 제가 당신에게 바칠 감정이 사랑 말고 또 있었습니까?

 

*

 

  수백의 아침이 지나가고, 수백의 밤이 흘러간다. 셰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어느새 셰키나 테오파네스의 이야기가 된다. 그는 마치 토트 카도케우스처럼 제게 묻는다.

  ‘네놈의 의견은 어떠하지? 그딴 재미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이세계의 네놈이 어찌 생각하는지 고해보아라.’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묻는 선악에 대답하고, 인간의 증명을 토로하며, 전쟁의 우스움과 신의 부질없음에 대해 고해바친다. 시간의 흐름은 무뎌지고, 저는 점점 인간에서 유리되어, 무대는 제 세계가 되어간다. 사라진 현실감은 서서히 심장에 스며들고, 희미한 사랑은 샤흐리아르에게 흐르며,

  종래에는 셰키나 테오파네스가 전혀 남지 않는다.

 

  제가 지금 하는 사랑은 누구에게 바치는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아라.”

  “사랑, 말씀입니까.”

  “네놈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아아, 문득 현의 잔상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미 셰헤라자데에게 먹혀 사라진 배우의 잔상이. 제게 사랑을 고하며 사라져가던 사람. 사랑하겠다 마음먹었던 순간. 구원받고 싶다 애원하고, 영영 저를 구원하지 않을 듯 내려다보던 사람. 그리고?

  사랑을 포기하고 제가 그를 구원하였던 순간까지.

  문득 제가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포기한 사랑을 끌어안고, 저는 이제 사랑을 이뤘다 생각하던 여인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아아, 확실해졌다.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이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생에 다시없을 괴로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득한 광기에 몸부림치는 도중에도 제 표정은 지독히도 덤덤했다.

*

 

  저무는 해는 끔찍하게 아름답다. 그래, 몰락하는 것들은 아름답다.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있고 포기하였기에 빛나는 것들이 있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은 어찌 되어야 하는가.

알고 있지 않은가?

  창가에 걸터앉아 내다보는 밖은 언젠가 작별했던 자유를 떠올리게 만든다. 네 손을 잡을 날이 멀리 있다 생각했건만, 그리 멀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바야흐로 천일 밤이 지나, 마지막 하루의 달이 떠올랐다.

 

*

 

  “네놈, 오늘의 이야기는 무엇이지?”

  “왕이시여, 이제 이야기는 없습니다.”

  덤덤한 목소리로 고해바치는 말 안에 가득 차오르는 것은 희열. 광기로 가득 찬 목소리는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배우가 인물이 되고, 인물이 배우가 되었을 때-

  저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무슨 의도냐.”

  “의도는 없습니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와 같이, 사랑이라도 고할 셈이냐.”

  “위대하신 술탄에게, 한낱 인간의 감정을 고해 올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더 이상 할 이야기를 떠올리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흘러넘치는 광기아래서 거짓으로 점철된 이야기들. 내게 상처준 이에게 어찌 모든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제 사랑을 알고도 묵인한 이에게, 제가 어찌 당신의 구원을 바랬노라. 네게 구원자의 자격을 쥐어주었노라 고한단 말인가? 얼굴을 찌푸린 술탄 앞에서 속이 없는 척 웃어 보인다. 늘 지어보이는 웃음과 같이, 그 어떤 이야기를 할 때도 고조되지 않던 목소리로, 저는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이제 마지막 하룻밤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소녀를 살려주시겠다 하였지요.”

  몸에 두른 것은 하늘하늘한 무희복. 술탄의 정비에게 어울리지 않을 옷은 첫날 입었던 혼례복을 떠올리게 만든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돌고 도는 생각이 춤춘다. 돌고, 파괴하고, 스러진다. 웃음을 참기 힘들어 어찌하지?

나는 이 짧은 생의 최초로, 네게 상처 입히고자 하고 있다.

  “허나 저는 역시 누군가에게 생사여부를 맡기긴 싫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천일야화(千一夜話)는 되지 못하더라도, 천일야화(千日夜話)는 될 수 있겠지요.”

  알 수 없는 다급함이 그의 눈에 깃든다. 그의 눈 속에 비치는 저는 웃고 있다. 지독한 웃음 속에서 선명하게 흘러넘치는 광기. 그래, 자신을 잃은 배우의 결말은 이것이다. 무대를 무덤삼아, 죽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웃음 짓고 춤추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 될 일이다.

  삶과 죽음 어디에도 가치를 둔 적 없으니.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절망인가, 상처인가. 아니면 그저 지루함? 답을 알기 싫어 뒤로 몸을 날린다. 드디어 이 길고 긴 연극이 최종장에 접어든다. 절정에 다다른 갈등은 누군가의 희생을 원하고, 희생을 말미암아 극적으로 치닫는 감정은 완벽한 이야기를 완성하리라.

  간절하게 뻗어 오는 손. 그래, 묻힌 기억 너머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색이 있다.

  선명한 청금석의 색.

*

 

책의 향.

도서관.

돌아왔다.

 

*

 

  희미한 의식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미미한 성취감,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는 자책. 그럼에도 그 순간을 지배하던 희열과 광기. 손에 잡힐 것처럼 일렁이던 결말.

  제 손으로 완성해 낸 스토리의 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쉽기 짝이 없다.

 

  “어이, 네놈. 어째서 거기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이냐. 돌아가라. 시간이 됐다.”

  낮으나 달콤하지 않은 목소리가 저를 뒤흔든다.

  긴 시간동안 마주한 달콤한 목소리 위에 그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죽을 자격을 얻어 죽었음에도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은 불만스럽다. 부러 운명을 비틀어 죽음에 뛰어들었건만, 어찌 살아나고야 말았는가. 죽음과 같은 암흑 속에 잠겨있고 싶었으나, 그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꾸물거릴 시간은 없다.

  흐릿한 눈이 초점을 잡으면 물체가 보인다. 제 앞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책은 익숙한 제목. 화려한 금박이 시선을 빼앗는다.

  아, 정말 돌아오고야 말았구나. 가슴 속에서 꾸물거리는 능력이 귀환을 알린다. 실로, 결말이 나고야 말았다. 운명을 한껏 뒤틀어 제가 그 세계에 갇히길 바랐으나 그 뒤틀린 틈으로 저는 기어 나온 모양이다.

  “말을 무시할 작정인가? 관심이라도 고픈 모양이지.”

  평소라면 그의 말에 대답할 테지만, 오늘은 침묵을 깨기 싫다. 제가 상처 입히고 싶었던 그 눈이 아무렇지 않게 저를 응시하는 것에 치기가 솟구친다. 지금 당신 앞에서 다른 세계의 말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오직 당신을 닮은 왕을 사랑하였고, 그것이 싫어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창작의 순간에 흘러넘치는 광기가 아직도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쩌지. 어색하게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손바닥 위에 놓여있는 스태프. 칼을 뽑아 당신을 찌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신은 날 죽여줄까?

  의미 없는 상상은 이쯤 하도록 하자.

  “잠시, 졸음이 가시지 않아 그랬습니다.”

  변명조로 내뱉는 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무언가 질책의 말이 날아오리라 생각했건만, 그는 저를 빤히 응시하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릴 따름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기에 저리도 유한 태도를 보이는가.

  알 수 없는 어색함에 뒷목을 문지르며 등을 돌린다. 그러나 시야의 사각으로 빠져드는 순간에 보인 반짝임. 놀라움에 고개를 돌리면 그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이 보인다. 어두운 색의 하드커버 위에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제목.

  천일야화. 

  선명한 청금석의 색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알고도 무시하려던 진실과,

  광기에 휩싸여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야기의 결말과,

  결국 지워내고야 말았던 희망의 조각들.

 

  저는 결국 진실을 또 외면하고야 만다.

 

*

 

“아, 하데스 씨?”

“기다렸다. 관측회의 건으로, 할 말이 있어.”

“관측회가 오늘이었던가요? 미안해요, 잊어버렸네요.”

 

도서관을 나가는 셰키나 테오파네스의 등을, 토트 카도케우스는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가 바라보고자 했던 건 누구인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