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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AU 드림 합작

노래의 왕자님

미카제 아이 x 현비파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 <성녀의 구제>

 

 

  피해자의 아내를 마중하러 나온 자리였다. 하네다 국제공항 도착 게이트 앞에서 하루카라는 이름을 적은 팻말을 들고 있었다. 바로 옆에 검은 정장 위에 남색 코트를 걸친 레이지가 서있었다. 레이지는 팔짱을 낀 채 게이트를 보다가 하품을 했다. 비파는 다시 도착 게이트로 고개를 돌렸다.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에는 오전 11시 30분 비행기가 10분 지연되었다고 적혀있었다. 시계는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 나오네요."

  "짐 찾느라 늦어지는 것 아닐까."

  "이렇게 오래 걸리던가요."

  "보통 그렇지? 난 저번 휴가 때 오키나와 공항에서 30분이 걸렸었다구?"

  "그건 선배가 너무 느린 것 아닐까요?"

  "너무해, 비비쨩!"

  "저기, 형사님들이신가요?"

  비파는 앞을 돌아보았다. 도착 게이트 난간 건너편에 진분홍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서있었다. 연갈색 판초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고동색 손가방을 들었다. 여자의 눈꺼풀은 조금 부어있었다. 키는 비파보다 조금 큰 정도였고 몸은 상당히 말랐다. 비파가 긍정하자 여자는 살짝 웃으며 밝은 노란색 눈동자로 비파를 보았다. 여자가 자신을 하루카라고 밝혔다. 그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비파는 팻말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전화 드렸던 경시청 수사1과 형사 현비파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레이지에게선 말이 없었다. 비파는 레이지를 보았다. 레이지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하루카를 보고 있었다. 비파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다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레이지가 화들짝 놀라며 비파를 돌아보았다.

 

  "어, 왜? 비비쨩."

  "인사 안 해요?"

  "아, 죄송합니다, 부인. 같은 경시청 수사1과 형사인 코토부키 레이지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레이지의 손이 조금 떨렸다.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피해자와 하루카의 집에 들렀다. 하루카는 사건이 일어나 현장과 정황에 대해 듣더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잠시 후에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걸 보고 비파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부엌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았다. 부엌은 무척 깔끔해서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식반이 이미 다녀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을 뿐이었다. 비파는 쓰레기통에 들어있는 플라스틱 물병을 꺼냈다. 물은 서너 방울 정도만 남아있었다. 다시 물병을 쓰레기통에 넣고 찬장을 열었다. 밑칸 유리잔을 둔 부분에 두 개 정도 자리가 비어있었다. 고개를 내리자 싱크대 안에 유리잔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비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장을 닫고 싱크대를 가만히 보다가 냉장고를 열었다. 정리정돈이 굉장히 잘 되어있었는데 생수가 들어있는 물병은 딱 하나뿐이었다. 비파는 하이라이트를 한 번 보고 싱크대에 연결된 정수기를 보았다. 역시 먼지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거실로 돌아오자 하루카와 레이지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동료 형사에게 물어보니 꽃에 물을 주기 위해 이층에 간다고 했다. 이층에는 수도가 없다고 하던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돌아와서 두 사람은 수사과장인 류야 앞에 섰다. 여러 모로 서로의 추론을 이야기하던 와중에 비파가 넌지시 자신이 가진 의문과 추론을 이야기했다. 레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류야가 물었다.

 

  "왜 아니라는 거야?"

  "류야선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알 수 있잖아? 피해자가 죽은 시각에 아내인 하루카씨는 홋카이도에 있었어. 홋카이도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도쿄에 있던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 말이 안 되잖아."

  "중간에 돌아오거나 할 수도 있겠죠."

  "비비쨩은 왜 그리 하루카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레이지가 미간을 찌푸렸고 류야가 비파를 보았다. 비파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싱크대에 있던 유리잔 때문이에요. 하루카씨는 정리정돈을 굉장히 잘 해두었어요. 그 흔한 먼지 한 톨 없을 정도였죠. 그런 사람이 3박 4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여행을 가면서 유리잔을 치우지 않았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 정도야 나중에 치워야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 피해자가 썼을 수도 있고."

  "찬장 위쪽까지 먼지 하나 없이 닦는 사람이요? 말도 안 되죠. 피해자가 쓴 컵은 독극물이 들어있던 커피잔뿐이었다는 건 감식 결과로 나왔잖아요?"

  "확실히 그 정도로 깔끔한 사람이 유리잔을 치우지 않고 여행을 갔다는 건 이상하지."

 

  류야가 긍정하자 레이지가 비파를 한 번 보았다가 류야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비파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 후로도 계속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국 홋카이도에 있는 사람이 도쿄에 있던 피해자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비파는 항상 도움을 얻는 물리학자를 찾아가기로 했지만 그 사실을 류야와 레이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테이토대학 건물에 들어섰다. 익숙한 계단을 올라가서 물리학과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물리학자의 연구실 앞에 서서 비파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노크를 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물리학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서 와, 비파."

  "오랜만이에요, 미카제 선생님."

  "비파가 찾아온 건 좋은데 왜 레이지에겐 비밀로 해야하지?"

 

  비파가 우물쭈물하자 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가스렌지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는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협조를 얻고 싶다면 제대로 말하라고 했다. 레이지가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이유를 설명하라며 머그컵에 커피를 따랐다. 비파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하얀 가운을 걸친 등이 무척 넓게 보였다. 비파는 술렁이는 심장을 잠재우고 입을 열었다.

 

  "코토부키 선배는."

 

  아이가 비파에게 머그컵을 건넸다. 비파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사랑을 하고 있어요."

  "뭐?"

  "코토부키 선배가 사랑에 빠졌다고요."

  "레이지가?"

 

   비파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눈에서 날카로움이 흐트러졌다. 당황한 모양인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것인지 아이는 느릿한 동작으로 머그컵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누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피해자의 아내, 즉 용의자를요."

  "흐응, 그렇게 자신감 있게 얘기할 정도라면 상당한 근거가 있어보이는데?"

  "당연히 있죠."

 

  아이는 안경테를 살짝 올리며 비파를 보았다. 비파는 심호흡을 두 번 했다. 단호하게 근거를 제시했다.

 

  "저도 사랑을 하고 있거든요."

  "뭐라고?"

  "저도 코토부키 선배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요."

  "네가?"

  "네."

 

  비파는 아이를 똑바로 보았다. 아이의 눈에서 다시 날카로움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는 다시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했다. 누구를 사랑하느냔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둘만이 있다는 사실에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비파는 한숨을 뱉었다. 말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결코 이 건을 넘어가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비파는 아이의 동요를 못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등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흔들림없는 곧은 자세였다. 비파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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